스리랑카 일주여행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9)-사자산의 옛 왕궁 터,「시기리야」

달리는 말(이재남) 2016. 9. 18. 21:40

                                                                 

-스리랑카 센트럴주, 카사파왕이 담불라 바위절벽에 왕궁을 세운 시기리야의 정원-

-스리랑카 센트럴주, 카사파왕이 담불라 바위절벽에 왕궁을 세운 시기리야의 정원-

 -스리랑카 센트럴주, 카사파왕이 담불라 바위절벽에 왕궁을 세운 시기리야-

-스리랑카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면서 만난 바위-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

-스리랑카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면서 만난 바위-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                     

 사자산의 옛 왕궁 터,시기리야

 

벌써 여행을 시작한지 사흘째로 접어드는 아침을 맞았다. 6시 반부터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기에 호텔로비로 올라가 가이드, 다미드를 만났다. 6층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각종 야채와 계란을 넣은 다음 치즈를 가미해 만든 오믈렛을 주문하고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수박과 바나나 그리고 파파야, 파인애플을 갖다가 먹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셨더니 부러울 것이 없다. 짐을 챙길 필요가 없으니 여유롭게 전용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담불라 관광의 백미라고 일컫는 시기리야를 향하여 출발했다. 시기리야에 도착한 필자일행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시기리야는 세계 8대불가사의 중 하나로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경치와 모습이 빼어나며 역사적으로도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자연절경중 하나이다. 부왕인 다투세나의 장남이었던 카사파는 부왕이 죽으면 자동으로 왕위의 승계가 가능했지만, 평민계급의 어머니를 두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의 이복동생, 목갈라나는 혈통이 좋아 형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카사파는 부왕인 아버지를 산채로 묻어버리고 왕위에 올랐다. 인도로 망명했던 목갈라나의 후환이 두려워 카사파는 바위꼭대기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불안감에 떨던 카사파는 산꼭대기에 요새를 만든 것으로도 부족하여 요새입구에 해자를 만들어 그 해자에 악어를 풀어놓았다고 한다.

시기리야는 사자산이라는 뜻으로 시기리야의 위용과 기세 높은 모습이 사자와 닮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카사파왕 당시의 시기리야는 사자의 굴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은 두려움을 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기리야는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다.

시기리야 정글사이에는 정원들이 있어 이 정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진흙으로 된 해자가 정원 가장자리에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다. 악어들이 지키던 해자에는 물고기들의 유유자적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시기리야의 바위요새는 그 높이가 무려 220m에 이르며 건축양식과 카파냐왕궁터가 아름답게 보존되고 있어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오늘날에도 많은 비가내리면 왕궁 아래쪽에는 모두 물에 잠긴다는데, 이 바위요새는 물에 잠기지 않을 뿐더러 저수지까지 갖추고 있어 당대 건축기술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저렇게 높은 곳에 세워진 요새에서 카사파왕은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까?

이 요새 아래로 펼쳐진 자신의 영토를 바라보며 자신이 빼앗은 왕좌를 빼앗길까봐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을까? 시기리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려 1200개에 달하다보니 고행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즐기는 기쁜 마음으로 여유 있게 한 계단씩 올라갔다.

바위요새의 절벽을 따라 가파른 계단이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웅장한 모습이지만, 계단을 오르면서 그 위용이 새삼스럽게 몸으로 느끼어 왔다. 이렇게 험준한 장소에 세워진 카파냐궁전은 과연 세계의 불가사의 8개중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올라갔다.

얼마나 적의 침략이 두려웠으면 많은 수의 적이 올라올 수 없도록 좁고 가파른 계단을 설계한 카사파왕의 두려움의 고뇌가 읽혀진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계단을 오르기 때문에 조금 올라가다가 쉬고 또 올라가기를 반복하였다.

18미녀도가 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오르는 길이 정체되어 오르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바위산 절벽의 철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돌출된 바위 벽면에 1400년 전에 그린 시기리야의 소중한 유산, 벽화가 남아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바로

풍만한 가슴을 매력적으로 드러낸 18명의 미녀도다. 시기리야의 석굴 안에 아름답게 수놓아진 미녀도는 500여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었다지만, 오늘날에는 많이 훼손된 채 18명의 미녀도만 남아있다. 미녀들마다 출신 나라가 달라 피부색도 제각각이며, 그림마다 다른 개성을 나타내고 있어 신비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미녀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미녀들의 허리 아랫부분은 구름으로 감추고 상반신만 옷을 벗은 채 장신구를 하고 있었고 인도 아잔타벽화에 가까운 그림기법을 사용했다한다. 18미녀도는 스리랑카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단다. 선명하면서도 뚜렷한 색채감과 표정의 자상함이 살아있어 이 당시의 찬란하고 화려했었던 왕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색채가 살아 있다는 것이 놀라운 따름이다. 18미녀도를 구경하고 서있는 필자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또렷한 색채감과 표정의 자상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