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일주여행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11)-스리랑카의 고대와 중세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6. 10. 3. 17:48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에서 바라본 주변경관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호수의 왕의 좌석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에서 바라본 주변경관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성터의 계단에서 바라본 주변경관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 5세기에 카사파왕이 세운 담불라의 바위 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에 오르는 중에 만난 18 미녀도 벽화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기리야 관광의 거점이 되는 담불라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된 석굴사원 입구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기리야 관광의 거점이 되는 담불라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된 석굴사원 입구

스리랑카 중앙의 센트럴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기리야 관광의 거점이 되는 담불라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된 석굴사원

센트럴주에 있는 작은 마을, 시기리야 거점이 되는 담불라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된 석굴암                                      

스리랑카의 고대와 중세사

 

스리랑카에는 선사시대부터 베다족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BC 6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인도의 아리안족이 스리랑카로 건너와 토착원주민 베다족을 정복하고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왕조를 건립하였다. BC 248년 인도의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왕자가 승려 4명을 이끌고 스리랑카로 왔다.

그들은 데바남피야티샤(Devanampiyatissa)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다. BC 2세기경 인도 남부에서 타밀족이 스리랑카를 침입하였다. 중세에 들어서 인도의 아리안족의 후예인 싱할라족과 타밀족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5~6세기 인도 남부지방의 타밀족은 싱할라 왕족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끊임없이 싱할라족을 침입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스리랑카 북부지역에 타밀왕국을 세웠다. 북부지역에 자리 잡은 타밀족은 힌두교를 믿으며 싱할라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관습을 유지하였다. 스리랑카는 1505년부터 약 440년 동안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부터 차례로 식민통치를 받았다.

1505~1658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포르투갈은 스리랑카 서부해안지방에 나타나 스리랑카를 무단 통치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가톨릭개종을 장려하고 유럽의 물질문명을 전파함으로써 스리랑카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658~1796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네덜란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중앙의 캔디왕국을 제외하고 해안지방을 거의 점령하였다. 통치의 주목적이 향료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버거족(Burgher)은 네덜란드인 후예로서 운하와 관계시설 정비에 종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