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팔의 여행

(2)-홍콩공항을 경유하여 델리의 인드라간디공항까지

달리는 말(이재남) 2015. 11. 3. 06:13

 

네팔의 룸비니에서 인도의 바라나시로 가는 중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일몰광경

룸비니의 과일가계

인도 바라나시의 초전법륜지(사르나트사원)

인도의 바라나시 갠지스강가의 일출광경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의 마야데비사원의 보리수나무

바라나시로부터 카주라호로 이동 중 만난 사람들

카트만두의 한국식 레스토랑                                                         

 

 

 홍콩공항을 경유하여 델리의 인드라간디공항까지

 

인천공항을 출발한 여객기는 시간이 조금 흐른 6시경에 기내식 저녁식사를 제공한다. 비행기에 탑승하면 늘 그렇듯 기내식은 깔끔하고 먹음직스럽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은 잠을 청해봤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기가 힘이 든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사이 우리가 탑승한 여객기는 중간 기착지, 홍콩국제공항에 8시 35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홍콩공항에서 내려야할 승객들이 내리고 나면, 공항당국의 직원들이 기내로 들어와 청소를 하는 사람들, 승객을 한 사람 한사람 체크하고, 심지어는 승객각자의 짐까지 체크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수다스러움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사실은 이곳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나보다. 시끌벅적 소란을 피우더니 볼 일을 모두 마치고 승무원들의 교대가 이루어지자 직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승객들이 채워지자 여객기의 출발이 시작된다. 홍콩공항을 출발, 고도를 잡고도 한참지난 후쯤, 수면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머리는 띵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여객기 안에서의 시간은 지루하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 현지시간으로 12시 40분경에 델리의 인드라간디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은 우리보다 3시간 30분 늦은 시차로서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4시 10분인 셈이다. 몇 개 안되는 창구로 Immigration(입국심사)을 하고 있으니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어느 나라 이민국이나 불친절하긴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곳은 더욱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천장 여기저기에 패널이 빠져 있고 벽은 허름하게 오래돼 보인다. 그동안 언론에서 보아온 「인도」라는 곳과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공항은 온통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고 표현하기 어려우리만치 지저분하다.

1시간 이상을 기다려 수하물을 찾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다. 밖으로 나가니 수많은 인도인들이 우리와 같은 나그네를 환영하면서 단체명이나 개인의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기다리며 서 있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인도인 현지가이드, Shivajit goswami 씨를 만나 미니버스에 짐을 싣고 호텔을 향해 달렸다. 길은 엄청나게 붐빈다. 도착한 날이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 새벽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벌써 3시가 넘는다. 인도사람들은 대체로 금요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보통 금요일 10시가 넘어서야 시작된 결혼식은 다음날 새벽 4시 이후에야 끝이 난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한 델리의 Samrat hotel에는 아직도 결혼식 관계로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우리를 태운 차량이 도착했는데도 길을 비켜주지 않고 자기네 볼일만 보고 있다. 가까스로 체크인하여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으나 너무 늦은 시간이고 너무 지친 탓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

 

 

인도의 역사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것은 드라비디아인(Dravidians)이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두 개의 도시에 남아 있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3000년경에 시작된 실용주의에 입각한 농경문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문명과 거의 같은 시대이다.

하랍파 문화는 기원전 2300년경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기원전 1700년경 쇠퇴하기 시작, 기원전 1500년경에 아리아인들이 침입해 인더스문명 위에 새로운 베다문명을 건설하였다. 아리아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헤매는 축산업 종사자들이었는데,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몇몇 도시국가들이 혈족중심의 공동체개념을 영토중심으로 바꿔놓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도시국가들은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주변의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거대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야망을 키워가기 시작했고, 최초의 통일국가가 건설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 뒤인 기원 전 4세기경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도 인도의 역사에 등장, 페르시아를 정복한 그는 신비의 땅에 발을 디디고 인도의 심장부를 향하지만, 결국 북서지역의 작은 왕국들을 정복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알렉산더가 물러간 뒤 찬드라굽타는 최초의 통일국가 마우리아왕조를 건설한다. 3대 왕인 아소카왕 때에 이르러서는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로까지 확장되었다. 마우리아왕조는 아소카왕을 끝으로 쇠락하기 시작해 기원전 1세기경 멸망한다.

마우리아왕조의 몰락 이후 인도는 320년경, 북인도지역의 대부분이 찬드라굽타 1세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5세기 초 찬드라굽타 2세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열어, 문학과 예술, 그리고 수학,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 분야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499년 천문학자 아리아바타는 π가 3.1416이며 태양년의 길이가 365.3586805임을 밝혀냈다.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하고, 음수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역시 인도 자연과학의 성과로 기록되어 있다. 황금기를 이루었던 굽타왕조도 내부적 분란과 훈족의 침략으로 몰락하고 만다.

7세기경 전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한 이슬람세력은 10세기에 인도에 발을 디디기 시작, 결국 인도에는 이슬람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뒤 수백 년간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이슬람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며 16세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주도하지만 남인도의 사정은 달랐다. 남인도의 왕조들은 술탄국의 진격을 막아내며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내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바부르가 인도를 향해 진격, 1526년 델리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뒤 무굴제국을 건설한다. 무굴제국은 아크바르황제 때에 이르러 남쪽으로도 영토를 넓혀 17세기에는 남쪽 일부를 제외한 거의 전 인도를 제패하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무굴왕조는 아크바르 황제시절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제국을 이슬람국가로 여겼으며 힌두교도들을 2류 시민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힌두교도들은 왕국을 보호하는 데는 관심조차 없었다. 시크교도나 자트족, 라지푸트족과 같이 호전적인 집단은 공공연하게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17세기 말, 데칸지방의 힌두왕국인 마라타왕국의 세력 확대와 무굴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200년간 북부인도를 통치했던 무굴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인도를 손에 넣은 영국은 무굴황제의 지위만은 남겨 둔 채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명목상으로나마 남겨 두었던 무굴황제의 지위를 박탈함으로서 300여 년에 걸친 무굴제국의 역사는 끝이 났다. 영국인들은 각자의 관심사만 가지고 있던 왕자와 부족장들로 하여금,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도록 교묘히 선동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농민들만 정권이 바뀌는 것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었다.

영국인들은 교육, 기독교로의 개종, 서구기술과 도구, 그리고 특히 영어라는 언어체계를 통해 인도를 서구문명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영어를 매개체로 이용, 영문학과 과학지식을 비롯한 앞선 학문을 원주민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학교와 전문대, 대학을 발전시켜갔다. 영국인들은 서아시아, 아라비아, 동남아시아, 유럽과도 교역을 했다. 영국은 인도고유의 법원, 군사나 종교시설을 소멸시키고, 벌어들인 이윤을 눈곱만치도 재투자하지 않은 채 오로지 노동력을 갈취하기만 하면서, 문맹률을 높여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