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의 발인 지하철 숩테 역 입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꼬리엔떼스 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광장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7월9일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독립선언을 기념하는 기념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묘지
2001년의 모라토리움(국가부도)
아르헨티나의 국가부도는 포클랜드 전쟁 때부터 서서히 다가와 결정적으로 망친 사람은 페론 부부였다. 포클랜드제도는 남미대륙 남단에서 동북쪽으로 480km 정도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위치한 섬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는 이 근방을 지배했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포클랜드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계승한 것으로 여겨 자국민을 정착시켰다.
1832년 영국이 자국민들이 먼저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추방하고 무력으로 점령했다. 풍부한 수산자원과 근해에 매장된 석유, 또 남극대륙 전진기지로서의 가치 때문에 영국은 포클랜드를 포기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국 간의 관계는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아르헨티나는 1982년 4월 2일 선전포고도 없이 포클랜드제도에 대한 침공을 강행했다. 그러자 영국군은 기동부대를 파견, 75일간의 격전 끝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 섬을 탈환했다. 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7백여 명, 영국 쪽에서는 250명이 전사했으며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몰락하게 됐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유럽 국가들의 식료품수입이 급증하였고, 제 1,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해지자 아르헨티나가 유럽에 다량의 식량을 수출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선진국수준에 이르는 부자의 나라가 되었다. 비옥한 땅에서 나는 농산물과 축산물수출은 막대한 무역흑자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6년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의 운명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페론은 농업, 목축업 대신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으며, 경제 분야에 정부가 직접 간섭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철도 및 공익사업을 국유화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이를 위한 자금은 당연히 그동안 무역으로 쌓아왔던 국고에서 나갔으며, 농, 목축업이 쇠퇴하자 수출도 부진해져 1946년 17억 달러에 달하던 외환준비고 는 10년 동안 4억 달러 남짓으로 감소했다.
그런데다 페론은 지나친 사회복지산업을 추진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국고를 바닥냈다. 1974년 페론이 죽자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으나,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하고 2년 뒤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그 뒤를 이은 정권들은 페론이 남긴 수출 감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짐을 져야했으며, 그 해결이 쉽지 않았다. 1985년까지 대외채무는 500억 달러에 달했으며 거기에 포클랜드전쟁의 후유증까지 겹쳐 국민경제는 파탄직전에 몰렸다. 경제 상태는 계속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아르헨티나는 결국 2001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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