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여행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의 여행(10)-우즈베키스탄 건국신화의 주인공, 티무르

달리는 말(이재남) 2013. 7. 9. 07:25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의 동상과 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의 동상과 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의 동상과 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입구정원)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입구정원)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의 광장)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티무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악사라이 궁전)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즈의 일몰광경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의 히르제 이맘 모스크 

 

 

우즈베키스탄 건국신화의 주인공, 티무르

 

 

티무르는 정복한 도시들의 주민과 반란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기술자들을 사마르칸토로 이주시켜 위대한 건축물들을 짓게 하기도 하여 훌륭한 문화유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402년 앙카라 부근에서 오토만제국의 황제 바예지드 1세의 군대를 격파한 후 사마르칸트로 돌아온 그는 오랜 숙원으로 남겨두었던 명나라의 정복을 준비했다.

1404년 말 티무르는 드디어 명나라의 원정을 개시했지만, 1405년 2월 오트라르(Otrar)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병사했던 것이다. 티무르가 사망하자 티무르제국은 급속히 분열, 약화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1508년 우즈베키족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기에 이른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인 영웅, 티무르는 구 소련시절과 서방세계에서는 잔인무도한 정복자이자 약탈자로 평가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칭기즈칸의 후예임과 초기에는 몽골제국의 자치국인 차카타이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면서도 몽골족의 "칸"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이슬람통치자인 "술탄"이기를 원했다.

그는 정복한 땅의 주민을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악명이 높았는데 이전의 이슬람통치자들과는 달리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조리 목을 쳐 죽였으며 1387년 이란의 이스파한을 점령할 당시에는 주민 7만 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니 몸서리가 쳐진다.

그러던 것을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그의 우상화가 진행되어 지금은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서방세계가 티무르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인색한 것은 아무래도 이웃나라에 대한 난폭함과 정복자라는 관념이 새겨져 있는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전쟁수행방식이 현대이슬람의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하는 "지하드"를 전쟁의 개념과 명분에 도입한 장본인이었기에 피해에 대한 망상이 더하여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한낮에는 말에서 내리지를 않았을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정복을 일삼았다.

그렇던 그가 명나라를 치러 전장 터로 가는 길에서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니 정복자의 최후치고는 좀 불쌍한 면이 있다. 그가 그때 죽지 않고 정복에 성공하였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야만적 정복욕에 불타던 그가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샤크리샵즈의 유물을 통해 상상해보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수확이랄 수 있겠다.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시키는 폭력적이고도 원시적인 힘을 이용하는 한편 학문이라는 안정성과 예술이라는 자유분방함의 존재가 그의 인격이었다면 위선적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앞에서 쏟아지는 비탄의 신음소리에 지쳐버린 그가 자국민들의 영혼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영혼의 휴식을 찾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악사라이궁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동쪽에 또 다른 유적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