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마카오,심천

홍콩, 마카오, 심천 여행(7)-『세도나 광장』과 한국 최초의 신부,『김대건 신부』

달리는 말(이재남) 2013. 4. 4. 07:24

                               

마카오 카지노 호텔외관

마카오 카지노 호텔외관

마카오의 성 도밍고성당

마카오의 관음당

마카오의 관음당

                                                                         

 

『세도나 광장과 한국 최초의 신부,김대건 신부

 

성 바울 성당 유적 앞의 큰 길을 내려오면서 우선 마카오의 명물이며 기념선물로도 인기가 높은 쿠키와 다양한 종류의 쫄깃한 육포를 맛볼 수 있는 거리가 나왔다. 육포랑 각종 과자를 파는 상점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육포도 물론 맛있었지만 작고 동글동글한 아몬드과자가 정말 맛있었다.

아몬드가루와 곡물가루를 넣어 만든 과자라는데 성 바울성당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가에 늘어선 점포들 중 육포와 애그타르, 쿠키, 과자를 시식할 수 있다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시식도 하고 맛있는 육포와 과자를 사먹으면서 세도나 광장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서 옷, 신발, 안경, 시계, 가방, 화장품 가게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간이 펼쳐지면서 거리는 고풍스럽고 민속적인 것에서 좀 더 젊고 국제적인 것으로 표정을 바꾸면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세나도 광장은 쭉 늘어선 점포들과 빽빽한 사람들로 명동을 방불케 했다. 이국적인 세나도 광장에서 뻗어나간 골목 안쪽은 큰 길과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이 오랜 시간 마카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을 말해주듯 시장과 노점, 북적대는 인파, 일상의 냄새와 소리 속에 마카오사람들의 활기찬 생활모습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몇 백 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인 중심지 역할을 한 세도나 광장은 포르투갈 리스본의 광장을 본 딴, 넓게 퍼지는 물결무늬 바닥과 둥근 분수,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 건물들이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다. 구시가지의 중심대로인신마로를 향해 삼각형으로 펼쳐진 이 광장 바닥의 모자이크는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돌을 하나하나 손으로 작업한 것이란다.

포르투갈의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세도나 광장의 물결모양의 모자이크바닥타일은 양 옆에 유럽풍의 화려한 건물들과 분수대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400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99년 중국으로 반환된 마카오는 최신식빌딩의 진열장으로 거듭났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있었으나 구경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마카오와 한국의 가장 역사 깊고 중요한 접점은 아마도 김대건신부일 것이다. 미사를 집전한 한국 최초의 가톨릭신부인 김대건신부는 충청남도 당진군의 독실한 가톨릭집안에서 태어나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수업을 받았다.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애쓰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그를 지금도 마카오 곳곳에서성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추앙하고 있다.

카모에스 공원에는 성바울 성당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순교한 김대건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도포에 갓을 쓰고 서있는 동상에는 한국의 가톨릭신자들이 꽃을 놓고 가기도 한다. 이 밖에도 각종 성당, 교회 등 유럽식건축물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마카오에는 박물관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살아 있는 박물관이 많다.

 

 마카오 성 안토니오 성당 김대건 신부의 동상

마카오 성 안토니오 성당

마카오 성 안토니오 성당 내부의 김대건 신부의 동상

 

경주용 차를 진열해 놓은 그랑프리박물관이나 1,100여종의 와인이 전시된 와인박물관 등은 의도적으로 건립됐지만, 해양박물관은 정박 중인 배의 모습이고, 마카오박물관은 몬테요새의 기반석 위에 세워졌다. 또 타이파 주거박물관은 타이파에 복원된 주택들이며 전당포박물관탁셍온은 1917년부터 최근까지 전당포로 사용된 요새 안에 있다.

전형적인 중국 전당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은 중일전쟁(1937~45년)기간에 전성기를 누리다가 금융업이 발달한 1970~80년대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당포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지만 이제 그 자체가 보물이 돼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나도 광장을 지나 필자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전용버스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