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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범 김구선생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19. 06:22

 백범 김구선생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원가계의 표지판-

우리가 묵었던 장가계의 호텔- 

-장가계의 천자산- 

-장가계의 나무열매-

-장가계의 입구-



백범 김구선생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호남성 박물관의 관광을 마치고 나와 점심식사를 하려고 현지식 음식점에 들어가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음식점에서 나와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달려 김구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시던 기념관에 들어갔다. 그분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시청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뜻밖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지난 5월 17일부터 6월 3일까지 18일간의 중남미여행을 했는데 함께 여행을 했던 이천희 씨 부부를 만났다. 그 부부는 중남미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많은 곳의 여행을 더 했나보다. 그 부부와 반가운 재회시간을 갖은 다음 일정을 위하여 아쉬운 작별을 했다.

"처음에 내 생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 된 것인가를 알았다. 저 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 할 수가 없고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분은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 독립운동 가이며, 해방된 조국을 민족, 통일, 민주, 문화의 바탕 위에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독립운동가 이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였으나 개명하여 구(龜, 九)다. 법명은 원종(圓宗)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출신으로 어려서는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한학수업에 정진하였다.

19세에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하였으며,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21세에는 왜병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다가 붙잡혀 인천에 수감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군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1899년에 환속하여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 설립을 비롯하여 계몽 교화사업을 전개했다. 1909년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 가담하다가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석방이 된 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경무국장이 되었고 1931년 한인애국 단을 조직, 의혈청년들을 직접 지도하였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추진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자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이끌어 갔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결정되었다.
그분은 1876(고종13)에 태어나, 독립운동을 하시던 중 임시정부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 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셨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장사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시절에 사용하시던 책상, 침대, 부엌 등을 구경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는 이번 여행의 핵심관광코스를 찾아, 장사 시내를 가로질러 장가계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