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일주여행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19)-스리랑카의 영국 식민통치

달리는 말(이재남) 2017. 6. 21. 06:40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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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 담불라 바위절벽의 왕궁, 시기리야의 왕궁터



                                                  스리랑카의 영국 식민통치


1796~1948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영국은 1815년 스리랑카의 최후 왕조인 캔디왕국을 멸망시키고 스리랑카 전국토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식민통치에 싱할라족과 타밀족을 모두 참여시켰으나 타밀족을 우대하였다. 1860년대부터 커피재배가 시작되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인도에서 다수의 인도계 타밀족 노동자들이 스리랑카로 이주하였다.
영국은 1880년 커피나무전염병이 퍼지자 커피재배를 차 재배로 전환하였다. 타밀족은 실론계 타밀족(Ceylon Tamil)과 인도계 타밀족(Indian Tamil)으로 크게 나뉜다. 실론계 타밀족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스리랑카 정부군과 무장 투쟁해 왔으며 힌두교를 신봉한다.

인도계 타밀족은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스리랑카로 이주하여 플랜테이션(Plantation)노동에 종사해 왔으며 성향이 온건하다. 이후 차, 코코넛, 고무 3대 농작물은 스리랑카 식민지 경제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신경제제도의 채택과 영어 공용어화교육을 비롯한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19세기 전반 스리랑카 전통이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인들 사이에서 자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인식과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서구 민주주의 발전과 인도의 독립운동의 자극으로 민족자결에 대한 요구와 독립을 위한 열망이 스리랑카인들 마음속에서 높아졌다.
스리랑카는 1948년 2월 4일 영국연방 내 자치국인 세일론(Ceylon)으로 출범하였다. 세일론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고 현지인 총독을 두어 국가원수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내각의 수반인 수상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영국식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으며 국가지속기간은 1948년 2월~1972년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