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일주 여행

(11)-이집트의 역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5. 12. 29. 06:10

이집트의 역사

 

이집트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고대 유물들이 말해주듯이 나일강 상류에는 약 60,000년 전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고, 고고학적 발견들은 기원전 3300년에 이미 전제정치와 종교문화가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후로 나일 삼각주의 하 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 이집트를, 상 이집트의 메네스, 즉, 첫 번째 파라오가 통일시켰다. 초기 이집트인들은 절대적 통치자인 파라오의 지배 하에 살았는데,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였으며, 오직 파라오의 책임 하에 사람들은 종교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집트 문화의 첫 전성기는 고대 왕국시기(기원전 2755~2255)라 할 수 있는데, 이시기에는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 왕조가 포함된다. 특히, 세 번째 왕조는 문화적 신선함과 힘이 꽃피던 황금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문학과 의학이 발달했으며, 성직자들은 이집트 신화에 성문화되어있는 여러 신들에 대한 여러흩어진 설들을 재연구해서 하나로 만들려 했다. 여러 개로 나누어진 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건축 프로젝트를 감독하기 위해 왕은 새로운 통치체제를 만들었고 최초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기원전 2134~1784년 중세왕국 시기, 활발한 문화 부흥시대는 11대 왕조 통치 하에 발전되었다.

 

기자 피라미드(Giza Pyramid)

 

건축은 있는 그대로의 선을 살렸고, 조정된 분할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화려한 장식, 특히 값비싼 보석과 도자기 장식이 생겨났는데, 이중에는 그 유명한 그린 수초로 장식된 파란 유리 하마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16세기, 신왕조는 국제적인 정복이 시작된 시기이다. 전사 파라오들은 상류 나일강과 저 멀리 누비아와 시리아를 따라 군사기지를 세우면서 이집트 정치 분리를 종결지었는데, 여기서 넘어온 이주자들은 이집트 인구를 크게 증가시켰으며 동시에 새로운 관습, 패션, 언어들을 소개했다.

페르시아 침입자들은 기원전 16세기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들의 침입이 있던 기원전 332년까지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고 있었는데,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그 휘하의 장군들은 그의 왕국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중 프톨레미가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고, 기원전 306년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를 건설하면서, 그 자신이 파라오가 되었다. 프톨레미 통치 하의 이집트는 시리아와 아시아 소국가들, 사이프러스, 리비아, 포에니시아 외의 다른 땅들로 여러 번에 걸쳐 통치권을 넓히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유력한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항

 

 

프톨레미의 통치 아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문화의 지성의 중심이 되었고,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프톨레미 왕국은 끝이 난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거의 7세기 동안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이 세력을 잡으면서,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고, 서기 313년 교회의 교리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신로마 정통파는 콥트기독교라 알려져 있는 이집트의 국교와 여러 국면에서 부딪히는데, 이것이 종교 갈등의 시작이다.

결국 나중에는, 콥트교도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알렉산드리아를 지목된다. 서기 641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는 무슬람교의 지도자 칼리프가 지명한 통치자들의 휘하에 있었다. 517년, 터키 술탄 셀림은 이집트를 오트만 왕국의 일부분으로서 터키의 소유 국임을 공표한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침략하면서, 1801년까지 통치하게 되는데, 이는 이집트에 관한 유럽 사람들의 관심을 재조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1805년, 알바니안 출신인 오트만의 장군인, 무하마드 알리는 지역 주민들의 협력 하에 권력을 빼앗는다. 무하마드 알리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이집트의 튼튼한 경제적 발판을 세우게 된다. 계속된 전투로, 알리는 이집트 왕국을 아라비안 반도와 수단까지 확대시켰다. 1849년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 이후, 이집트는 점점 유럽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인도로의 가장 빠른 길이 이집트라는 것을 알고 있는 영국은 이집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영국제재소를 위한 면의 공급지로서 수에즈 운하로까지 뻗게 된다.
그리고 터키가 1차 세계 대전에 독일편으로 개입하면서,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선포한다.

전쟁 후, 이집트는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와 폭력으로 가득했다. 계속되던 폭력시위는 1922년 영국이 이집트를 푸아드 1세의 통치아래 독립된 왕국으로 인정하면 서 끝이 났다. 그대로 접어들어1948년, 이집트는 다른 여러 아랍 국가들과 함께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막기 위한 여러 전쟁에 참여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성공적이지 못한 결과를 무력한 정부를 탓하게 되고, 군대는 푸아드의 아들인 파룩 왕을 적대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1952년 모하메드 나귀브 장군 휘하에 군대 장교들이 왕을 내쫒고, 이집트는 1953년 공화국이 된다.

에드후의 신전 건립당시의 모습

에드후의 신전 현재의 모습

에드후의 신진

에드후의 신진

에드후신전의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