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9.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계룡산 동학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29. 16:53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계룡산 동학사

 

1. 동학사가 자리 틀고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하여 계룡산(鷄龍山)이라 부른다고 한다.(2004. 3. 7) 2. 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3. 호랑이가 맺어준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다. 앞에 보이는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며 뒤로 보이는 5층 석탑이 오누이 탑이다. (2003. 10)동학사의 전경

4. 봄볕에 드러난 동학사 전경이 아늑해 보이기만 하다.
5. 대웅전 앞에서면 계룡산 주봉인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6. 동학사엘 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사진의 왼쪽이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이며 오른쪽이 동계사다.
7. 동학사에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다. 선방은 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8. 봄날을 맞은 비구니 학승들이 울력으로 경내를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봄빛에 드러난 빡빡 머리에 고깔모자라도 씌워주고 싶다.
9. 계룡산 동학사에 봄은 이렇게 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단청을 배경으로 한 단색의 목련 몽우리가 잘 어울린다.
10. 봄은 물오른 나무에만 오는 게 아니고 양지쪽 빨랫줄에도 와 있었다. 봄볕에 드러낸 빨래들이 해바라기를 하고있다. 자연은 민심을 거스르지 않는다.

'민심이 천심'이라 한다. 민심은 심해처럼 조용하고 태산과 같이 육중하여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거스름 없이 가야 할 곳을 향해 오로지 흐를 뿐이다. 그러기에 민심은 없는 듯하나 분명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다. 역사적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면 민란이 일어나곤 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894년(고종 31) 무지랭이 농사꾼인 줄로만 알았던 농민을 주축으로 지배층의 탐학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봉건, 반침략 운동인 동학혁명도 민란이다.
예나 지금이나 평민들은 봉기를 일으킬 만한 힘도 권력도 없고 조직도 정비되어 있지 않다. 민심은 자의적이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다. 부귀권세를 누리며 소소한 일에도 일희일비가 엇갈리는 관리들과는 달리 바위처럼 갈대처럼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던 백성들은 뜻과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면 그게 민심이다.
똑똑 떨어지는 처마 끝 낙숫물 모여 작은 도랑 만들고, 그 도랑들이 개울물 되고 강물 되어 누구도 거역치 못할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듯 민심이 마치 이를 닮았다. 벙어리처럼 말하지 않고, 장님처럼 보지 못한 듯 이런 일 저런 일 묵묵히 담아 넘기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뜻이 모여지고 힘이 합해져 범람하는 물줄기 같은 흐름의 여론을 형성하니 그게 바로 드러난 민심이다. 흉흉해진 민심은 원성이 되고 그 원성이 커지면 결국 민란이 되는 것이다.

동학사 중 대웅전 정면


110년 전 동학혁명 때 분노한 민심은 죽창과 연장을 손에 들었다. 부처님을 향해 빌고 빌던 그 손, 새싹을 키워 양식거리로 만들어가던 그 순박하고 투박한 손에 움켜쥔 죽창과 연장은 그들의 분노며 최소한의 방어였다. 애처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며 정의롭게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110년이란 장고의 시간이 흐른 오늘 분노한 민심은 죽창대신 촛불을 밝혀 들었다. 촛불의 흐름이 전국의 어둠을 밝히니 민심의 역동이 시작되었다. 끓는 분노를 토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두들겨대는 자판 소리가 방방곡곡서 천둥소리처럼 메아리치니 시대에 걸맞게 형성된 민심의 물결이다.
필자가 태어난 1960년. 권력을 연장하려는 정치 모리배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3·15부정선거는 4·19를 야기시켰고 결국 그들은 민심에 굴복하였다. 동서고금에서 그 어떤 권력도 그 어떤 무기도 민심의 흐름을 거역해 승리한 역사가 없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아전인수격으로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를 인용했다. 사필귀정은 역사가 판단하고 민심이 판결하지 착각이나 입맛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다. 싸늘한 밤 공기를 데우고 어둠을 걷어내는 움켜쥔 촛불은 사필귀정으로 가기 위한 민심의 등불이며 당찬 몸부림이다.
누군가가 3·12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고는 누군가에게 '자업자득'이란 표현을 했다. 그래, 자업자득이 어떤 것인가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민심을 요동시키는 엄청난 업보를 자행한 그들이 얻는 게 과연 무엇인지 지켜볼 일이다. '동학'이라는 동음(同音)과 최초의 집회 장소인 공주라는 지역적 상관성 때문인지 동학사(東鶴寺)로 가는 내내 대표적 민란인 동학혁명이 떠오르고 4·19와 5·18 그리고 87년 6·10대회까지 번갈아 그려진다.
땅!땅!땅! 의사봉을 두들기던 3·12 대통령 탄핵 가결 장면을 밑그림으로 움켜쥔 촛불이 그려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초라하다 못해 비굴하도록 떨리던 목소리의 하야 성명과 민심이 뭔지도 모른 채 만세를 부르던 3·12 주역들의 목소리가 공허한 되돌림 노래처럼 귓전을 맴돈다.

동학사 남매탑


접근조차 거절할 듯 수북하게 쌓였던 눈들이 정말 '춘풍에 봄 눈 녹듯' 거반 녹아버렸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의 민심인가보다. 겨울 위용을 유지하려는 엄청난 폭설도 도도히 흐르는 세월이란 민심엔 어쩔 수 없이 무너지고 양보되니 말이다. 자연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민심에 순응하며 양보도 알고 물러섬도 아니 걱정스러울 게 없다. 허나 탐욕에 눈먼 인간들의 흐려진 판단은 민심을 알지 못해 아등바등 저항하다 서로에게 아픔만 남기니 그게 문제다.
선덕왕 23년(724)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지어 상원사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동학사는 명산 계룡산 동쪽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절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어 절 이름을 동학사라 했다는 설과, 고려말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원조인 정몽주를 제사 지내므로 동학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동학사가 있는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 같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계룡산은 전국의 웬만한 도인들의 수도 경력엔 빠짐없이 등장하고 태조 이성계가 왕도의 진산으로 정했을 정도로 기혈 왕성한 명산이다.
계룡산은 논산과 공주의 영산(靈山)으로 한국의 오악 중 하나로 꼽힌다. 계룡산서 발기한 정기가 신도안으로 뻗었으니 신도안이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이성계가 왕도로 정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616년 전인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한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를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탐문한 끝에 지금의 신도안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고려 때부터 신도안이 도읍지로 더 없이 좋다는 이른바 '도참설'도 있었지만, 이성계 자신도 직접 둘러본 결과 적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도할 도읍지가 결정되자 대궐을 세우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천하제일의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만사를 호령하던 절대적 왕권이 있었기에 모든 일은 거칠 것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읍을 천도하고 대궐을 짓는 일이란 게 원체 대사이기에 이성계는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제단을 차려놓고 국운왕성과 무탈천도를 천신께 빌고 있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사가 진행되어 터가 다듬어지고 주춧돌이 놓여질 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고 있던 이성계에게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현몽하여 다짜고짜 나는 계룡산 신령인데 여기는 정도령의 도읍지니 공사를 중지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을 하였다.

동학사 중 삼은각 정측면


계룡산 신령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언젠가 계룡산 정기를 타고 태어날 정도령이란 신인(神人)이 왕이 되어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8백년간 태평성세를 펼칠 그의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갑작스레 나타난 백발 할머니상의 산신령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이성계였지만 할머니의 위풍당당함에 눌려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지금 주춧돌까지 놓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그냥 천도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일언지하에 "만약 공사를 계속하면 앞으로 큰 화가 미쳐 국위의 존립 여부는 물론 생명까지 위태로울 것"이라 말하였다. 할머니의 태도가 워낙 냉랭하고 단호한지라 할 수 없이 이성계는 "이곳을 떠날 테니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해야 할지 그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할머니는 "여기서 5백리 북쪽으로 올라가 그곳에 가서 도읍을 정하라" 일러주니 그곳이 조선 5백년 도읍지인 현재의 서울, 한양이다. 기도 삼매에 빠졌던 이성계가 정신차려 주변을 살폈으나 계룡산 할머니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신도안으로 천도를 포기하며 "흙 한줌이라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수많은 일꾼들이 신에 묻었던 흙을 한곳에 털어 대니 그 흙이 모여 지금의 신털봉이 되었다 한다.
입으로 전해지는 한낱 설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쩌면 당시의 민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성계는 막강한 권력으로 추진하던 천도에 따른 민심 이반과 원성이 발생하자 산신령을 등장시켜 민심을 수습하는 기지를 발휘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런 명산의 길지에 자리잡고 있는 동학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일주문을 지나 동학사 직전, 계곡에 걸린 정자 앞에서 오른쪽 산길로 1시간쯤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남매탑부터 봐야 한다.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와 서쪽에 있는 갑사의 중간 지점인 삼불봉 아래, 옛 청량사 터에 세워진 두개의 탑이다. 오누이 탑인 5층탑과 오라비 탑인 7층 석탑은 각각 보물 제 1284호와 1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지쌍탑(淸凉寺地雙塔)이라고도 불린다.
남매탑에도 애틋한 전설이 유래한다.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이 계룡산에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런 맹수의 포효에 혼비백산했던 스님이 정신차려 호랑이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큰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박혀있기에 이를 뽑아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호랑이는 아리따운 처녀 한명을 입에 물고 와 수도승 앞에 놓고 갔다.
목에 걸린 가시를 빼준 은혜를 보답하는 뜻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와 정신을 잃었던 처녀는 스님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다음날 정신을 차렸다. 처녀는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초야의 신방도 차리기 전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도 너무 많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둘은 토굴에서 겨울을 넘기게 되었다. 드디어 봄이 되어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둘이 함께 살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불심 깊은 수도승은 남녀가 인연을 맺는 파계는 있을 수 없기에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는다. 그렇게 맺어진 두 남매는 비구와 비구니로 불도에 힘쓰다 한날 한시에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두 남매의 정과 불심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모시게 되니 바로 '남매탑'이라 한다. 이 남매탑의 주인공은 동학사를 창건한 회의의 은사스님이 되는, 신라 성덕왕 15년(716)에 당나라에서 입국한 상원화상이라고도 하니 동학사의 뿌리는 이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하다.
32번 국도를 따르다 박정자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넓은 진입로는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동학사 관문이다. 멀리 닭 벼슬을 닮은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이 후련하도록 넓고 반듯하게 만들어진 길에는 속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훨씬 넘었을 노령의 벚나무들이 가로수로 온몸 벌려 길손을 맞아들인다.
마을이 나오고 삼거리가 나오니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고개를 넘으면 그곳이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였던 신도안이며 육군본부가 들어선 계룡대가 있다. 벚나무 터널을 지나 주차를 하면 그곳부터 계곡에 늘어트린 산 그림자가 절 찾는 발길을 안내한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애교 섞인 부름이 속세의 끈끈한 연 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매표소를 지나 오리쯤 걷게되는 진입로는 한마디로 혼자 걷기엔 너무 아까운 그럴싸한 데이트 코스다. 물길 따라 산 그림자 따라 뚜벅뚜벅 걷다보면 계곡에 걸린 육모정인 세진정을 지나게 된다.
세진이란 '마음속에 있는 번뇌의 티끌과 온갖 더러움을 맑은 계곡에 씻어 내듯 깨끗이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육모정에 올라 마음만 펼치면 일부러 염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속세의 온갖 번뇌와 오욕칠정이 씻길 듯하다.

 동학사 중 일주문 정측면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고 졸졸거리는 청아한 물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설법으로 목탁소리로 다가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을 따르면 남매탑으로 가게 된다. 세진정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풍광이 일품이어서 언뜻 동학사가 아닌가 싶지만 그곳은 동학사 산내 암자인 관음암과 길상암이다. 두 암자를 오른쪽에 두고 계곡을 따라 몇 발자국 더 들어가야 비로소 동학사에 이르게 된다. 동학사가면 대웅전 오른쪽에 세 개의 사당이 보인다. 고려말 삼은을 모신 삼은각,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동계사,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키 위해 초혼제를 지내는 숙모전으로 이런 전각은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전각들이다.
고려말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음에도 동학사엔 그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세워져있으니 바로 삼은각이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조선 500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배불의 근간이 되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곤경에 일조한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지금껏 제를 지내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와 보시를 실행으로 옮긴 실천불교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웅전에서는 계룡산의 삼불봉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고 빙 둘러선 산들이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다.
재잘대듯 흐르는 물소리는 무료함을 달래주고 간간이 스치듯 불어주는 바람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준다. 빡빡 깎은 비구니 학승 머리에 반사된 봄볕이 유난히 반짝인다. 문득 진한 눈썹에 맑고 커다란 눈동자에 담겨 있는 학승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필자가 생각하는 민심에 고개를 끄덕여 줄지 아니면 옆으로 흔들지가.
화병이라도 날 듯 뒤틀린 심사로 산사를 찾았건만 길 없는 곳서 길을 찾고 바위틈을 오르느라 심호흡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춘풍에 봄눈 녹듯' 민심을 뒤틀리게 하는 이런 저런 일들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4월 15일, 총선이 있는 바로 그날 '붓 뚜껑'에 담긴 민심의 물결에 말끔히 녹았으면 좋겠다.
민심은 산고와 껍질을 깨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희망이 보인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어느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촛불을 움켜쥔 손으로 환희와 축복의 박수를 칠 결과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우쑥 자란 주권과 누군가가 말한 '자업자득'의 결과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동학사의 겨울풍경

========================================= 덧붙이는 글 =========================================
[동학사 찾아가는 길]

1.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 IC → 23번 국도 → 월송 교차로 → 32번 국도(대전방향) → 박정자삼거리 → 동학사
2. 경부고속도로 → 회덕분기점 → 호남고속도로 → 유성 IC → 32번 국도(공주방향) →
박정자삼거리 →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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