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여행

7)-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21. 08:19

 

 김지윤 작가의 몽골 초원

 몽골 전통 민속공연

 몽골 전통 민속공연

 몽골 흡소골 공원 겔 켐프의 입구에서 보이는 겔

 몽골 흡소골 공원 입구

 몽골 흡소골 공원 겔 켐프 

 몽골 흡소골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


계속된 유목민들의 흥망성쇠



칭기즈칸(成吉思汗:1155년경~1227년 8월18일)을 가리켜 몽골제국을 창업한 초대 大 칸이라 칭한다. 어릴 때의 그의 이름은 테무친(鐵木眞)이라 불렀으며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그를 표현할 때 가장이란 수식어가 늘 붙어 다니듯 대단한 사람이었다. 몽골 역사자료들에 의하면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하며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에 사는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상품과 그 지역에서 나는 호화상품들을 갖고 싶어 했지만 유목민들이 이와 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을 해서 얻거나 무력약탈을 통해서 강취했었다. 중국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지역에서 나는 생산품들의 필요가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목민들의 내침 등 유목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을 확장한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몽골정복의 역사는 이와 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 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태무친의 출생연도에 관한한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없다. 태무친의 본명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쟁에서 패퇴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몽골왕족 보르지긴 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사람들은 그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친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를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친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 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