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휴가

23.마이산의 금당사와 이산묘

달리는 말(이재남) 2020. 10. 7. 07:19

마이산의 금당사와 이산묘  

금당사로 올라가 금당사 목불좌상(金塘寺 木佛坐像)을 만난다. 중국의 승려 혜감(慧鑑)814년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금당사에 있는 불상으로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상이다본존불은 사각형의 평판화된 얼굴에 비교적 당당한 체구이며, 양 손을 들어서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둥글게 움츠리고 있는 어깨와, 도식화된 옷자락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우 보살은 복잡한 보관(寶冠)이나 가슴의 구슬장식, 두 손에 잡은 연꽃가지 등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면 본존불과 흡사하다. 이 불상은 둥근 맛 나는 양감과 온화한 얼굴표정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진안사람들 중에는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을 존숭하고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 많았다. 송병선은 제자 이도복이 진안에 우거하자 여러 번 진안을 찾아 왔으며, 최익현은 1906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 있는 삼우당에 머물면서 진안을 순행하였다.    

-마이산 대웅전의 불상-  

이에 송병선과 최익현을 기리기 위해 친친계(親親契)와 현현계(賢賢契)를 결성하였다. 1924년 친친계와 현현계 회원들은 마이산에서 두 계를 통합하고, 송병선과 최익현을 기리는 사당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19241218일에 충청남도 공주 숙모전(肅慕殿)에서 개최된 경향 유회(京鄕儒會)에서 진안 대표 오채열(吳采烈)의 제안으로 사당설립을 추진하여 19253월에 이산묘 건축을 시작하였다.

-진안 마이산의 석탑-사당은 모두 4칸으로 서쪽은 인지재(仁知齎), 동쪽은 여택헌(麗澤軒)이라 하였다. 또 고경각(高京閣)을 건립하여 송병선과 최익현의 진영을 봉안하고, 그 역내를 통칭하여 이산 정사라 하였다. 문은 치종문(致宗門)이라 불렀으며, 회덕전(會德殿)을 건립하여 조선 태조 고황제를 배향하고 같은 해 912일 향사를 지냈다. 

-진안의 마이산-

-진안의 마이산-  

이듬해 봄에 제사를 지내고자 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자 제일(祭日)을 바꾸고 제관(祭官)10인으로 한정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다. 그 뒤 일본의 방해와 파괴 공작으로 1927년에 헐어서 치워버렸다.  

진안의 마이산

-진안의 마이산-

 

광복 후인 1947년 회덕전에 단군과 조선 태조, 세종대왕 등을 배향하고 명칭을 이산 정사(駬山精舍)에서 이산사(駬山祠)로 바꾸었다. 이후 임금을 배향했기 때문에 이산묘라고 개칭하는 것이 옳다는 성균관 사림의 의견에 따라 이산묘로 부르게 되었다또한 회덕전 아래 동서 양쪽에 사우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永慕祠)라 이름을 붙이고 조선의 명유(名儒) 40위를 배향하였고, 서쪽은 영광사(永光祠)라 이름 하여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선열 34위를 배향하였다. 1984년에 전라북도 전주시 건지산에 있던 고종황제의 위판을 회덕전으로 이전 봉안하여 4위가 되었으며, 2008년에는 영모사에 후산 이도복을 추가 배향하였다이 마이산의 석탑, 화엄굴, 은수사, 금당사, 이산묘를 두루 구경하면서 많은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날씨가 덥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다보니 많은 땀을 흘려, 승용차가 주차되어있는 입구로 내려오면서부라보 콘을 샀는데 완전히 바가지요금이다.  

진안 마이산의 입구

-진안 마이산의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