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의 자이승 승전기념탑
몽골 울란바토르 자이승 승전기념탑 아래의 불상
자이승 승전기념탑 바로 아래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이승 승전기념탑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이승 승전기념탑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이승 승전기념탑의 그림
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이승 승전기념탑
자이승 승전기념탑 바로 아래 이태준 열사의
「울란바토르」의 역사와 몽골문화
울란바토르는 1639년에 세워졌으나 옛 몽골 제국이 수도를 여러 번 이동한 끝에 1778년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도시의 이름도 몇 번 바뀌었는데 1639년부터 1706년까지 현재 울란바토르 시보다 42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던 우르지 그리고 이흐 후레, 1911년부터 1923년까지 니스렐 후레, 마지막으로 1923년부터 울란바토르가 되어 정치, 경제,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수도의 인구는 2000년 현재 70만 명이며 인구의 68%가 30살 미만의 젊은이들이며 전체국민의 1/4은 수도에 살고 있다. 그들 중 대략 70%가 아파트에 살고 나머지는 몽골 전통 가옥인 겔에 살고 있다. 울란바토르는 국가산업의 42%를 생산하고 있으며, 전기공업, 경공업과 식품생산 분야에 집중되어있다.
산업과 주거 공간, 문화시설들이 이 도시에 인구를 집중시켰으며 마침내 70만이 넘는 인구의 대도시가 되었다. 1990년, 사회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와 다당제가 도입되어 세계의 자유 시장으로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외국의 앞선 현대문화와 기술, 시스템들의 유입과 함께 커다란 변화가 울란바토르에 있게 되었다. 몽골어는 핀어, 터키어, 카자흐, 우즈베크와 한국어가 포함된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세계에서 몽골인들, 내몽골인들, 부랴트, 칼무크와 투바인 들을 포함해서 7백만 명이 몽골어를 쓴다. 몽골말은 코나 후두보다 혀, 이, 입천장 및 입술을 많이 사용하여 소리를 낸다. 몽골말에는 어휘수가 많아, 외국어를 다양한 표현과 용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반대로 몽골의 독특한 생활, 풍습과 환경 때문에 몽골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기는 힘들단다. 인구의 90% 이상이 몽골어(할하 몽골)를 사용하고 있으며 바양울기 등 카자흐 족이 살고 있는 일부지역에서는 카자흐어와 몽골어가 혼용되고 있다. 제2외국어로는 러시아어로 70여 년 동안 유지해왔으나, 요즘은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과 더불어 영어, 독일어, 불어, 한국어, 일어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울란바토르」의 자이승 승전기념탑
드디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가 오후 3시경이다. 자그마한 버스에 짐을 싣고 출발하여 달려간 곳은 울란바토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진 자이승 승전기념탑이다. 타고 온 버스에서 내린 필자일행은 고개를 쳐들고 승전기념탑을 올려다보니 몽골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난 크기로 눈에 들어왔다.
올려다 보이는 승전기념탑까지는 숨이 차 헉헉거리며 270개가 넘는 계단을 따라 걸어서 올라갔다. 소련이 몽골연합국과의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몽골사회주의혁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몽골에 기증한 탑이다. 탑이 있는 자이산은 울란바토르 시내와 톨 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아주 좋은 장소 같았다.
우리나라의 남산처럼 울란바토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몽골의 연초인 설날(차강사르)이나 결혼식이나 졸업식과 같은 좋은 날에 이곳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는 몽골사람들을 얼마든지 많이 만날 수 있단다. 올라간 기념탑 둥근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혁명의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얼굴들 가운데에는 몽골 공산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가 있다.
그는 몽골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1921년 7월10일 울란바토르에 몽골인민정부를 수립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몽골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수흐바토르의 아버지는 외몽골 동부의 세첸한부 출신 유목민이었는데, 너무나 가난하여 1890년 지금의 울란바토르 땅 고륜(庫倫)으로 나왔다.
수흐바토르는 1909년 역참(驛站)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독립 후 정부군병사가 되었으며,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다. 그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굳어지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 몽골인민당 결성에 참가하였고 이르쿠츠크로 가서 소비에트의 원조를 요청하여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으로서 중국군과 웅게른의 러시아 백군(白軍)을 캬흐타에서 쳐부수고 고륜으로 진격하여 새로운 정부 수립에 성공하였다. 또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V.I. 레닌과 회담하고 몽골의 사회주의혁명의 길을 열었으나 혁명 후 약 1년 반 뒤 3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승전 기념탑의 안쪽 벽면은 러시사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모자이크벽화로 그린 그림이 둘러싸여있다. 기념탑은 1938년과 1945년 두 차례에 결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수도의 인구는 2000년 현재 70만 명이며 인구의 68%가 30살 미만의 젊은이들이며 전체국민의 1/4은 수도에 살고 있다. 그들 중 대략 70%가 아파트에 살고 나머지는 몽골 전통 가옥인 겔에 살고 있다. 울란바토르는 국가산업의 42%를 생산하고 있으며, 전기공업, 경공업과 식품생산 분야에 집중되어있다.
산업과 주거 공간, 문화시설들이 이 도시에 인구를 집중시켰으며 마침내 70만이 넘는 인구의 대도시가 되었다. 1990년, 사회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와 다당제가 도입되어 세계의 자유 시장으로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외국의 앞선 현대문화와 기술, 시스템들의 유입과 함께 커다란 변화가 울란바토르에 있게 되었다. 몽골어는 핀어, 터키어, 카자흐, 우즈베크와 한국어가 포함된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세계에서 몽골인들, 내몽골인들, 부랴트, 칼무크와 투바인 들을 포함해서 7백만 명이 몽골어를 쓴다. 몽골말은 코나 후두보다 혀, 이, 입천장 및 입술을 많이 사용하여 소리를 낸다. 몽골말에는 어휘수가 많아, 외국어를 다양한 표현과 용어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반대로 몽골의 독특한 생활, 풍습과 환경 때문에 몽골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기는 힘들단다. 인구의 90% 이상이 몽골어(할하 몽골)를 사용하고 있으며 바양울기 등 카자흐 족이 살고 있는 일부지역에서는 카자흐어와 몽골어가 혼용되고 있다. 제2외국어로는 러시아어로 70여 년 동안 유지해왔으나, 요즘은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과 더불어 영어, 독일어, 불어, 한국어, 일어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울란바토르」의 자이승 승전기념탑
드디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가 오후 3시경이다. 자그마한 버스에 짐을 싣고 출발하여 달려간 곳은 울란바토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진 자이승 승전기념탑이다. 타고 온 버스에서 내린 필자일행은 고개를 쳐들고 승전기념탑을 올려다보니 몽골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난 크기로 눈에 들어왔다.
올려다 보이는 승전기념탑까지는 숨이 차 헉헉거리며 270개가 넘는 계단을 따라 걸어서 올라갔다. 소련이 몽골연합국과의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몽골사회주의혁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몽골에 기증한 탑이다. 탑이 있는 자이산은 울란바토르 시내와 톨 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아주 좋은 장소 같았다.
우리나라의 남산처럼 울란바토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몽골의 연초인 설날(차강사르)이나 결혼식이나 졸업식과 같은 좋은 날에 이곳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는 몽골사람들을 얼마든지 많이 만날 수 있단다. 올라간 기념탑 둥근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혁명의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얼굴들 가운데에는 몽골 공산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가 있다.
그는 몽골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1921년 7월10일 울란바토르에 몽골인민정부를 수립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몽골혁명의 아버지로 불린다. 수흐바토르의 아버지는 외몽골 동부의 세첸한부 출신 유목민이었는데, 너무나 가난하여 1890년 지금의 울란바토르 땅 고륜(庫倫)으로 나왔다.
수흐바토르는 1909년 역참(驛站)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독립 후 정부군병사가 되었으며,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다. 그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굳어지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 몽골인민당 결성에 참가하였고 이르쿠츠크로 가서 소비에트의 원조를 요청하여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으로서 중국군과 웅게른의 러시아 백군(白軍)을 캬흐타에서 쳐부수고 고륜으로 진격하여 새로운 정부 수립에 성공하였다. 또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V.I. 레닌과 회담하고 몽골의 사회주의혁명의 길을 열었으나 혁명 후 약 1년 반 뒤 3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승전 기념탑의 안쪽 벽면은 러시사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모자이크벽화로 그린 그림이 둘러싸여있다. 기념탑은 1938년과 1945년 두 차례에 결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몽골 여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기스칸의 나라 몽골(5)-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간 홉수골의 겔 켐프 (0) | 2015.08.19 |
---|---|
징기즈칸의 나라 몽골(4)-「이태준 열사」를 기념하는 이태준 기념공원 (0) | 2015.08.18 |
징기즈칸의 나라 몽골(2)-어렵게 잡았던 여행코스 (0) | 2015.08.14 |
24.징기스칸의 나라 몽골 (1)-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의 몽골 (0) | 2015.08.13 |
23.끝)-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0) | 201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