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20.성지, 당고개

달리는 말(이재남) 2012. 11. 29. 07:40

 

새남터가 바라보이는 언덕

 

미리 걸어 보는 십자가의 길

당고개 순교지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성지 입구


성지 오르는 계단


예수성심상


성지 전경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 걸식으로 묵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된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히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메고 희광이를 찾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 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새남터, 당고개와 용산의 사적지

한국의 순교 성지나 사적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곳만을 따로 떼어 내 설명하기란 어렵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순교터인 새남터, 서소문, 절두산,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노고산, 삼성산, 왜고개, 용산 신학교, 명동 대성당 등이 순교자들의 유해 이장과 관련하여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용산 일대는 새남터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성지와 사적지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새남터의 저녁 풍경. 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 성심 신학교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순교 기념탑


야외 제대


순교기념 청동부조


성모상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자로는 사남기(沙南基) 또는 노량사장(鷺梁沙場)으로 표기되어 왔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1890년부터 이곳의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 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재 한식의 새남터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이 새남터의 북쪽 공터는 일찍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는 중죄인인 경우에는 서수문 밖 대신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 모반죄로 처형된 남이(南怡) 장군의 형 집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새남터가 천주교 순교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당한 때부터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맞이해 들인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 신부. 그러므로 그의 최후를 지켜본 신자들은 훗날 그의 성덕을 기리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함께 어울어진 형장의 모습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현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와 마찬가지로 군문효수를 당해 그 머리가 장대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러나 20일 후 용감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수습되어 노고산(老姑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런 뒤에도 새남터의 북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1846년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성 현석문(가롤로)이 다시 망나니의 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6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우세영(알렉시오), 정의배(마르코)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정의배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고, 나머지 시신은 신자들이 거두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3처

 

한편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는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망나니들의 칼날이 10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본래 이곳은 형지가 아니었지만, 상인들이 닥쳐 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도록 요청한 때문이었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이제 당고개는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근래에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 성지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순교 성지 새남터와 당고개는 이렇게 창조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북소리가 이곳을 찾아 순례하는 신앙인들의 마음 안에서 울리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곳에서 처음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초기의 순교자들과 함께 훗날의 시복 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 후손들의 순례가 계속되고 그분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한 시성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2호(1999년 3월), pp.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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