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여행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55)-잉카언어인 케추아 말로 코리칸차, 「황금의 정원」과 거대한 요새, 사크사이와만과 켄코

달리는 말(이재남) 2014. 1. 17. 05:47

페루 쿠스코 코리칸차의 황금정원

페루 쿠스코의 코리칸차

페루  쿠스코의 코리칸차에서

페루  쿠스코의 켄코유적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뒷편의 예수님동상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주변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뒷편의 예수님동상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쿠스코 사크사이와만

페루의 전통의상(쿠스코의 음식점입구)

 

 

 

잉카언어인 케추아 말로 코리칸차, 「황금의 정원」

 

 

잉카제국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에 세워진 산토도밍고 교회는 어느 스페인 정복자의 글에 신전의 벽마다 황금장식이 있어 그 황금빛에 눈이 부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곳이 금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신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교회에는 태양의 신전 초석이 남아있다. 쿠스코 대지진 때 스페인 정복자들이 지은 대부분의 건축물이 파괴되었지만 잉카의 구조물들은 끄떡없었을 만큼 그 튼튼함과 정교함이 증명된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코리칸차는 잉카제국이 번영하던 시절 태양신전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쿠스코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잉카언어인 케추아 말로 코리칸차, 즉「황금의 정원」이 있다. 코리칸차는 당시에는 이름처럼 벽이 온통 금으로 덮여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는 돌로 만든 것들만이 남아 있는 곳이다. 스페인정복자들이 코리칸차의 건물부분은 파괴하고 잉카인들이 만든 돌담위에 산토도밍고성당을 건설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신전의 초석은 쿠스코 대지진에도 건재할 만큼 그 튼튼함과 정교함이 증명된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코리칸차는 아직도 건물의 아래바탕이나 벽면은 검은 색의 칼사이트 석으로 된 당시 신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역시 정복의 상처이지만, 어느 정복자가 이교도의 신전을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정말 면도날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정교하게 바윗돌을 깎아 쌓은 잉카석공들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곳은 또 잉카의 마지막 왕인 아타왈파 왕이 스페인침략자, 피사로 일행에게 감급당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힘을 빌려 형제를 친 아타왈파 왕은 스페인에 배반당하고 방 가득히 황금을 채워주면 풀어준다는 피사로의 약속을 믿고 무려 6톤의 금을 모아 주었으나 끝내 교수형을 당하고, 호화찬란했던 잉카제국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왕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백성들이 모아주었던 금붙이는 금은세공에 뛰어난 잉카인들이 정성을 다해 만들은 정교한 예술품이다.

그 금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예술품들을 운반하기 쉽도록 녹여 금덩어리로 만들었다. 결국 잉카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에 의해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네 곳의 다른 유적으로는 가까운 곳에 사크사이와만, 켄코, 푸카 푸카라, 탐보 마챠이 등이 있다.

그리고 쿠스코 서쪽에는 남미에서 가장 장관이며 잘 알려진 마추픽추가 있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여행객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이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는 여전히 웅장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페루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이 반드시 보아야 할 유적이다.

 

거대한 요새, 사크사이와만과 켄코

 

 

 

코리칸차 앞에서 일행을 싣고 언덕을 한참 올라가 산허리의 커브를 도니 유칼리나무들이 길가에 뽐내며 서있다. 원래 이 나무는 캐나다에서 들여온 나무인데 이곳의 토양에 잘 맞아서 빨리 번식한다. 달리던 전용버스는 거대한 요새의 입구에 도착했다. 80100톤에 이르는 큰 돌에서 몇 톤에 이르는 규모의 돌들을 잘 다듬어진 채 정교하게 맞물려 담벼락을 이룬 요새다. 돌을 깎아 다듬어서 세워놓았지만, 빈틈하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세워 45층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탑 모양의 요새를 건설했다.

해마다 6월말에 잉카제국을 기념하는 태양제, 인티 라이미(Inti Raimi)가 열린다.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꼽히는 이 행사를 보려고 세계에서 여행객들이 모여든다. 축제는 쿠스코 근교의 유적 사크사이와만을 무대로 열린다. 사크사이와만은 쿠스코를 지키는 대(大) 요새로 엄청난 거석을 사용했다는 것과 돌을 쌓는데 있어 돌과 돌 사이에 충전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빈틈 하나 없이 쌓았다는 점에서 잉카의 탁월한 건축능력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쿠스코 시내의 전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 사크사이와만의 1층은 물을 담는 저수지 같은 곳이고, 2층은 무기를 보관했던 창고였고, 3층은 점성술을 보던 천문대로 이용했단다. 퓨마의 앞발에 해당하는 곳이 중앙공원이고 꼬리부분은 파란 잔디가 있는 부분이란다.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퓨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사크사이와만은 유판키 왕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2만여 명씩 사람을 동원한 끝에 83년에 걸쳐 완성한 거대한 요새다. 어떻게 운반하고 축조하였을까 놀라울 뿐이다.

정상에는 거대한 해시계를 설치했다. 도시 주요농작물이던 감자, 옥수수의 재배나 수확시기를 가늠하기 위한 시계라는 것이다. 스페인사람들이 쿠스코를 정복한 후에 새 도시를 꾸미느라 윗부분의 돌을 가져갔기에 현재는 12층의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캔코는 사크사이와만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사크사이와만이 돌을 쌓아 올린 것이라면 켄코는 돌을 깎아 만든 것이다. 켄코는 잉카제국의 제례가 열렸던 곳으로 퓨마가 조각되어 있는 6m의 거석을 중심으로 왕이 앉았던 옥좌 등이 남아 있다. 잉카인들의 돌을 다루는 神技에 가까운 솜씨를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직도 어린아이를 살아있는 제물로 바쳤다는 신전이 남아있다. 번개의 신전은 큰 돌덩어리로 묘하게 만들었는데 번개 칠 때의 양상을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행사인 태양 제를 이곳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는 잉카의 황제가 저쪽의 좋은 자리에 앉아서 직접 집전했다고 한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퓨마모습을 하고 있으며 잉카인들의 거석신앙과 동굴숭배를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로 몸을 움츠리며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는 잘 깎은 제단이 있고 여기서 옛날 사람들은 성물인 우아카를 전시하고 야마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사크사이와만에서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성스러운 샘 탐보마차이(Tambomachay)가 있다. 잉카제국의 목욕 터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흐르는 물의 근원을 찾고자 여러 곳의 강과 연못에 색소를 흘려 조사해보았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신비함이 더하는 곳이다.

쿠스코는 표고 3,74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해 사람에 따라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고산병은 고도에 따른 산소부족현상으로 두통, 권태감, 피로, 구토감 등을 보인다. 가급적 수분을 많이 섭취하며 푹 쉬는 게 방법이며 쿠스코에서는 뜨거운 물에 코카 잎을 우려낸 마테 데 코타(Mate de Cota)차를 주로 마신다. 녹차와 비슷한 맛이지만 코카 잎은 코카인의 원료이므로 국외 반출은 금지된다. 농사를 짓는 잉카인들에게 물은 무엇보다 귀중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를 내리는 야파에게도 제물을 바쳤을 것이고, 또 일정하게 흐르는 지하수가 있는 곳에도 제단을 꾸며놓고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그리 크지 않았던 잉카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기 전 몸을 청결하게 할 수 있도록 위에서 흐르는 샘이 세단계로 거쳐 밑으로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탐보마차이는 또 잉카귀족들의 휴식을 취하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나지막한 산에 맑은 지하수가 항상 일정하게 흐르니, 쿠스코에서 소풍을 올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