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터키 여행 31

터키의 에페소는 주로 유적지나 기독교 성지여행의 성격을 많이 띤다.

누가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누가의 무덤에서는 잠깐 동안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었다. 그곳 누가의 무덤으로부터 조금씩 걸어가면서 소아시아시대의 수도였고 기독교의 중심지였으며 사도 요한이 살다가 죽은 곳, 에페소를 관광했다. 그래서 기독교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 그 에페소의 유적지를 돌아보게 됐다. 옛 항구도시는 지금은 바다가 수 킬로미터가 물러나 있는 내륙 도시로 변해버렸다. 지중해를 돌아다니던 배들이 이곳에 도착해 짐을 부렸던, 또 이곳에서 짐을 싣고, 로마로, 알렉산드리아로, 안타키아(안디옥)로 떠났던 소아시아의 수도가 에페소였다. 에페소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중의 하나이다. 에페소는 전설까지 포함에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아시아의 수도였었..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마지막회)-그리스와 터키의 문화체험

19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는 격심한 인플레와 좌우 양파의 내란을 겪게 되었다.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은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미국은 십 수억 달러의 원조로 정부 측을 지원했다.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19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형편을 배경으로 왕당파․공화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계속되었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성립되는 등 정국불안이 계속되었다. 그리스 필로파포스 언덕정상 올리브월계관 그러나 1981년 10월 G.파판드레우가 이끄는 PASOK(범그리스사회당)가 득표율 4..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32)

터키의 카파도키아 그리스의 독립은 1829년 아드리아노플화약(和約), 1830년 런던회의에서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前)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18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원래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기고, 경제의 확립과 국토의 확장정책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하였다. 즉 독립 후의 그리스사(史)는 밖으로는 국토확장 책,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 그 2가..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31)-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

터키의 카파도키아(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아내는 타쉬켄트 공항에서 찬 몸으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몸에 이상을 느끼는 모습이다. 한 참 동안 지압을 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더니 조금씩 좋아졌고, 결국 피곤하긴 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인천공항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려는 지금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두 나라를 관광했는데 그 관계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터키인들은 유목 민족만의 대륙적인 기질과 오스만제국과 같은 대 제국의 국민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남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는 민족답게 자존심이 강하고 당당하며, 용감하며,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에 우호적이며 적극적이다. 오스만제국 당시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터키인의 민족성이 아닌 오스만제국 사람들의 국민성만이 존재..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30)-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공항

우즈베키스탄 상공 8시 50분 아타튀르크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타쉬켄트공항에 현지시간으로 새벽 3시 15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인천공항 행 우즈베키스탄항공 HY513편으로 갈아타려면 타쉬켄트공항 안에서 무려 7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출발할 당시 일본인 여행객들이 대단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 일본인 여행객들과 타쉬켄트 공항에서 내려 함께 보내는 동안 일본사람들에 대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좋은 인상이 완전히 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수백 명의 여행객들이 함께 사용하는 비좁은 공항대기실에서 일본인 남녀 여행객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그 장소에는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담배연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장소를 피하려고 여행객들은..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29)-터키의 이스탄불

유럽쪽 이스탄불에서 바라본 아시아쪽 이스탄불과 두곳을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 히타이트,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초기기독교, 비잔틴문화 그리고 이슬람문화의 진수들이 이스탄불이라는 한 도시, 그것도 길 하나 사이를 두고, 또는 한 장소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만 들어도 황홀한 성 소피아, 블루모스크,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우스, 톱카프궁전, 지하궁전 등이 몇 분 거리 안에 산재해 있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단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스탄불은 BC 660년 전 최초로 그리스인들이 이주 정착하여 상업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스탄불(ISTANBUL)-성 소피아 성당(ST. SOPHIA CHURCH)-내부 그 후 AD 196년 로마황제 셉티미우스가 이 도시를 점령, 로..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28)-이스탄불의 그랜드바자르

유람선에서 바라본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 예쁜 집들 보다 더 예쁜 동화 속의 집들이 해안을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을 자랑하며 먼 나라에서 온 이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 관광유람선은 보스포루스 대교주변에 돌마바흐체 궁전과 500년 전부터 역대 술탄들에 의해 조성된 아나도루 루멜리공원을 지났다. . 막 그곳을 지나 11시 40분쯤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광유람선으로부터 내려, 대기하고 있던 전용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보스포루스 해협이 잘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있었다. 코스별로 차례로 나오는 현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해협의 여기저기에 떠다니는 배들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다리 레스토랑에서 나온 일행들은 그랜드 ..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27)-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사원(불루모스크)

이스탄블의 아름다운 블루모스크 메흐멧 아가(Mehmed Aga)는 훌륭한 건축가 일뿐만 아니라 작곡가이며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이 모든 분야에서 오스만튀르크 최고의 예술인이어서 시와 음악, 건축과 타일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싶어 했고 그 큰 꿈을 블루모스크를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이 건물의 도안에서부터 작은 무늬 하나하나까지, 문과 벽에 그리는 그림까지도 혼자 결정했다.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선지자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지은 사원보다 더 훌륭한 사원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성 소피아성당을 건설했고, 술탄 아흐멧 황제 또한 성 소피아성당보다 더 훌륭한 사원을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블루모스크를 건설하는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사원(불루모스크) 이..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26)- 톱카프궁전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사원(불루모스크)- 특히 당시 이스탄불을 지배했던 오스만제국의 술탄 마흐메드 2세의 행동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관용적이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이 들어선 이후 바뀐 것은 성당이 모스크가 되었고, 따라서 모스크 안에 메카를 향하는 경배 당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유적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코란문양을 기존의 성화에 덧입혀 놓기만 했던 것이다. 비잔틴의 성화도 아름답지만 그것을 파괴하지 않은 오스만제국의 포용력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런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성 소피아성당이다. 예로부터 이스탄불은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태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등의 다양한 민족이 별 무리 없이 지내온 것으로 유명하다. ..

그리스와 터키를 다녀와서(25)-이스탄불 성 소피아성당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의 한가로움- 분위기가 좋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감지하고 민병렬씨와 필자가 내려가 사과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충고를 하게 됐고, 곧 이어 올라온 그녀는 본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식사가 늦어져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게 됐다. 어떻든 저녁식사를 하게 됐고 호텔에 들어가니 10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일이 또 발생했다. 이 날은 일행 40명 가운데 우리부부를 포함하여 9명만이 다른 호텔을 사용하게 됐다. 더더욱 황당한 일은 9명만이 옮겨간 그 호텔에서 벌어졌다. 홍순규씨 부부가 호텔로비에서 받은 열쇠로 방문을 아무리 열어도 열리지 않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려봤더니 외국인이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열어주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기절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