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서 시신 숫자 세던 외신 기자…故 테리 앤더슨을 기억해야 할 이유|인물탐구영역 [JTBC] 입력 2024-04-27 07:00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렸던 테리 앤더슨 기자가 76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광주에서 본 참혹한 광경은 종군기자였던 그에게도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고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고 회고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 기록자'의 이야기를 인물탐구영역에서 알아봅니다.
어둠 속 시신 세던 남자
1980년 5월, 어둠 속에서 시신을 세는 백인 남성이 있었습니다. 이 남성의 직업은 기자, 이름은 테리 앤더슨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남성은 시신을 세고 있었던 걸까요?
앤더슨은 AP통신의 아시아 특파원이었습니다. 평소엔 일본 도쿄에서 머물다가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다지던 1980년 5월 한국으로 들어왔죠. "광주에서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도청 건물을 포위했다", "군인들이 발포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앤더슨은 광주로 달려갔습니다.
"광주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택시 운전사를 설득해 외곽까지는 갔는데, 여기서 택시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광주에서 빠져나오는 시민들이 "저기는 위험하다,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줬는데, 택시 운전사가 더는 못 가겠다고 해서 도시 안까지는 걸어가야 했던 거죠. 몇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었는데 버스가 불타고 건물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폭도가 휩쓸었다"고 신군부가 호도한 바로 그곳, 광주에 도착한 겁니다.
-5.18 민주화운동기념식-
계엄군의 거짓말
테리 앤더슨 기자는 계엄군에게 "지금까지 몇 명이 죽었냐"고 물었습니다. 계엄군은 "세 명이 죽었다"고 했죠. 그런데 현장에 직접 와보니 상황이 달랐습니다. 광주에 오자마자 세봤더니 한 장소에서 발견된 시신만 179구. 총에 맞거나 몽둥이질을 당하거나 차에 깔린 모습들이었습니다. 앤더슨 기자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었지만, 이런 충격적인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고 하고요. 그때 처참한 모습과 시신에서 나던 냄새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앤더슨 기자는 깨달았습니다. 전두환 세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죠. 숨지거나 다친 시민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사로 적었는데, 모든 통신이 끊겨 송고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10㎞ 넘게 논두렁을 달려 시골 우체국에서 기사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군인들은 5월 27일 새벽 2시 시민군에 최후통첩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공수부대원들이 도청으로 돌격해 빌딩 꼭대기부터 한층 한층 내려오며 '인간 청소'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앤더슨은 다른 외신 기자 두 명과 함께 도청에 들어가 또다시 시신을 세야만 했습니다. 계엄군은 이번에도 "군인 한 명과 반란군 한 명, 총 두 명이 죽었다"고 거짓말했는데, 도청 앞마당에만 17구의 시신이 있었죠.
텔렉스를 버리지 못한 기자
여기엔 전날 기자회견에서 "오늘의 우리는 패배할 것이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 외쳤던 청년의 시신도 있었습니다. 시민군의 언론 담당 윤상원 열사였습니다. 9일 동안 광주에서 이런 상황을 모두 지켜본 앤더슨에게 광주의 참상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때문인지 송고했던 기사 텔렉스를 버리지 못하고 15년 가까이 다락방에 간직했고 자신을 찾아온 한국 언론인에게 기증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광주에선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감정이 울컥하고 말할 수 없는 울분과 분노 이런 슬픔이 가득 차서 이런 상태로 기사를 써도 되나 하고 우려할 정도였다.' 군인들은 매번 거짓말을 했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아주 분노하고 있었죠."
이후 '특파원 리포트'에선 5.18 민주화운동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당시 외신 기자들이 없었다면 광주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앤더슨이 7년 동안 레바논에 감금돼 있을 땐, 자신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 같다는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 전두환이 재판에 넘겨지는 걸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와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느꼈던 우리나라의 변화만큼, 우리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적어 내려갔던 기록자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문헌
테리 앤더슨 외(1997),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
지오바니 델오토(2020), 〈AP, 역사의 목격자들〉, 크레센도
정대하(2016), 〈오월 광주와 외신 기자들〉, 주먹밥 제48호, pp.16-19
MELDRUM & WEBER(2024), 〈Terry Anderson, AP reporter abducted in Lebanon and held captive for years, has died at 76〉,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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