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휴가

28. 제주의 역사

달리는 말(이재남) 2020. 10. 26. 16:06

제주의 역사  

제주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제주시와 한림(翰林)사이의 해안 및 산록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곳은 어로자원과 수렵대상물이 풍부하고 외적 방어에 유리하며 용천이 풍부하다··부의 삼신인(三神人)이 용출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삼성혈(三姓穴)도 초기 거주민의 주거지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전설의 주인공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 후에 梁乙那부을나(夫乙那)는 탐라개국과 문중(門中) 창시에 주역을 담당한 실제인물이 설화로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성혈은 탐라의 기원과 제주문화의 발상지이다.    

삼성혈에는 500여년 이상의 노송들과 녹나무, 조록 나무 등 수십종의 고목이 울창하다

삼성혈에는 500여년 이상의 노송들과 녹나무, 조록 나무 수십종의 고목이 울창하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부기(附記)된 주호(州胡)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당시의 지리적 환경과 생활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 , 그들은 삼성혈을 근거로 황량한 벌판에서 수렵생활을 했으며, 가죽옷을 입고 짐승의 고기를 식량으로 삼았다. 고을나 이후 고씨가 탐라국의 통치자로 세습되었으며, 그들의 생활거점인 일도(一都: 지금의 一徒)는 토지의 비옥도, 수리이용, 어로조건, 한반도와의 교섭에서 최적의 취락입지를 갖춘 곳이다이러한 일도·이도·삼도의 지명은 상하(上下)의 지명과 함께 지명 설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高厚) 삼형제가 탐진(耽津: 지금의 康津)을 통해 신라에 내조(來朝)하자 왕이 국호를 탐라(耽羅)라고 하였다. 탐라국은 498(동성왕 20)에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속국으로 되었다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탐라국은 방물(方物)을 바치고 조회(朝會)했으나, 1105(숙종 10)에 왕제(王制)가 폐지되고 탐라군으로 격하되었다. 고려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 통치함으로써 이때부터 한반도에 예속된 도서이자 통치의 말단행정구역이 되고 말았다. 1211(희종 7)에 탐라를 제주로 개칭하고 부사와 판관을 두었다.  

제주의 삼성혈 박물관

-제주의 삼성혈 박물관-  

1271(원종 12)에 김통정(金通精)이 진도에서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와 귀일촌(貴日村)에 항파두리성(缸坡頭城)을 쌓고 이곳을 거점으로 여몽군(麗蒙軍)과 항쟁을 벌였으나, 2년 후 1만여 명의 여몽연합군에 의해 전원 옥쇄하였다. 또한 그해 원나라의 직할지로 편입되어 목마(牧馬)를 위한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들어서 고려 왕조에서의 분리와 원의 예속을 번갈아 겪었다. 그러한 동안에 흡적(哈赤)의 난 등 사회적 혼란이 없지는 않았으나, 목축의 전통과 이를 위한 방화(放火)및 환상(環狀)의 토지이용 경관이 나타났다. 또 가축의 침입을 막고 토지소유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석장(石墻)과 언어·풍속에 몽고적 요소가 나타난 것이 이때부터이다의종 때에는 말단행정단위로 현촌(縣村)을 두었는데, 이는 탐라의 개국 이후 거주공간이 제주읍성 밖으로 확산된 최초의 기록이다. 현촌의 분포는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한 동서지역에 집중되어 거주공간은 북사면의 해안지방에 편중되었고, 반도부와의 통로는 삼별초와 관군의 진입로로 보아 추자명월 간으로 되어있다근세사회로 이행되면서, 특히 남 제주지방은 제주읍성과 멀리 떨어져 있어 관민(官民)간의 연락이 지연되고 관리들의 수탈로 피해가 컸다. 그리하여 1416(태종 16)에 인구증가에 의한 개척의 진전추이를 감안해 행정구역을 크게 개편하였다한라산을 경계로 북사면에 제주목(濟州牧), 남사면에는 서귀포의 고근산(孤根山)을 경계로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두어 3읍제(邑制)를 실시하였다. 

제주 돌 박물관

제주 돌 박물관

-제주 돌 박물관-  

당시 3읍의 중심지로 제주 목은 제주읍성에, 대정현과 정의현의 읍성은 각각 대정읍 보성리와 표선면 성읍리(최초에는 성산면 고성리)에 두어졌다. 그 뒤에도 행정직제의 개편이 있었으나 행정구역만은 3읍 분할의 전통을 계승하였다1909년에는 대정군·정의군을 제주군에 병합하는 한편, 전라남도 완도군 추자면을 편입하였다. 1915년에 일제는 제주 3읍제를 폐지하고 도제(島制)를 실시함으로써 112면으로 편성되었다. 행정구역의 명칭은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라고 했고, 도청은 제주읍내에 두었으며 도사(島司)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1917년에 환상의 일주도로가 해안마을을 관통해 개통됨으로써 종래 내륙으로 진출했던 말단행정중심지가 해안마을로 이동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광복 이후 격절된 특수 환경을 감안해 1946년에 도()로 승격되었으며, 남제주군·북제주군을 설치해 2112면이 되었다6·25전쟁 때는 반도로부터 많은 피난민이 이입해 도시발달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사회·문화면에서 낙후성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에 제주 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5678일에는 서귀·대정·한림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써 12310면으로 개편되었다.

제주 돌 박물관

제주 돌 박물관

제주 돌 박물관

-제주 돌 박물관-  

1962년에 한라산횡단도로가 개통되면서 제주시와 서귀포의 거리가 단축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고 귤·유채 등의 상품작물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개발붐에 따라 도시화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고, 198171일에 서귀포 읍이 중문 면을 포함해 시로 승격되었다. 1985101일에 조천 면이 읍으로, 1986년에 구좌읍 연평출장소가 우도면으로 승격되었다. 200671일부터는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하면서 북제주군이 제주시에,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새로운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