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金堤 碧骨堤」의 역사적인 배경
「金堤 碧骨堤」의 역사적인 배경
「金堤 碧骨堤 農耕文化博物館」은 김제「碧骨堤」의 문화를 재현해보려는「金堤 地平線祝祭」가 매년 10월 7~11일이면 성대하게 열리는 장소를 말한다. 김제「碧骨堤」는 金堤市에서 井邑市 방향으로 29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김제시 입석동, 장화동을 지나 신덕동에 이르게 된다. 신덕동에서 원평천(川)을 가로 질러 놓인 제2신덕교, 제1신덕교와 제2포교, 제1포교를 건넌 뒤 감곡역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여기에서 약 500m 정도 더 가면 신용리의 신용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농경지로 되어 있는 碧骨堤의 현재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 김제「碧骨堤」는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와 그 제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의 이정표-
이후 벽골제는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며 보수·중수되어 왔다.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벽골제일대의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현재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月昇里)에 위치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둑이다. 벽골제가 한국 최초의 저수지라는 실증적인 자료는 1415년의 중수비에 기록된 5개의 도랑의 존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대규모의 저수지 축조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토목기술이 발달했다는 점은 한국과학기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벽골제는 A.D.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후, 파손과 중수가 반복되었다. 그 후 벽골제는 1420년 둑이 터진 후, 모경과 저수답의 제방구실을 하였다. 일제시대(1927년)에는 운암저수지 물의 유역을 변경시켜 광활 간척지로 보내는 간선수로의 제방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의 길이는 60,843척이고 제내주회(堤內周回)가 77,406보이며 혜택면적이 약 9,840결이다.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그리고 저수지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약140㎞)이고, 여기에 물이 가득 찼을 때에는 그 면적이 5천 정보 정도라고 적혀있다. 또, 벽골제의 수문 중에서 수여거는 그 물줄기가 만경현(지금의 이름은 만경면)의 남쪽에까지 뻗어 나갔다. 장생거는 만경현의 서쪽에, 중심거는 고부군의 북쪽과 부령현(지금의 이름은 부량면)의 동쪽에, 경장거와 유통거는 인의현의 서쪽에까지 이르렀다. 현재벽골제는 2500m의 제방(둑)과 둑에 딸린 시설로는 북단 수문터였던 장생거와 둑의 남단 수문터였던 경장거 2개의 수문만이 남아있다. 이 두개의 수문에 대해서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행해졌으며, 1980년에 장생거에 대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각 수문지마다 높이 550㎝, 폭 750㎝ 두께 50~60㎝인 석주가 2개씩 있고, 석주의 안쪽 면 가운데에는 폭 20㎝, 길이 12㎝의 홈이 위에서 아래 까지 파여 있다. 이 홈에 목판을 끼워 놓고 이것을 상하로 움직여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이다. 석주 사이의 바닥에는 물이 흐를 때 바닥이 패이지 않도록 하려고 납작한 석재를 깔아 놓았다. 장생거와 경장거는 저수지의 물을 아래로 내보내는 통로이었기 때문에, 석재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