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여행

이란여행(16)-중세페르시아와 중국문학에 가교역할을 했던 국제적인 시인

달리는 말(이재남) 2015. 2. 10. 06:18

 

 

쉬라즈의 카림 칸성 내부  

쉬라즈의 카림 칸성 내부 

쉬라즈의 코란게이트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 박물관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크세르 크세스문

(단체사진-우측으로부터 두번째가 필자부부임)

 

 

중세페르시아와 중국문학에 가교역할을 했던 국제적인 시인

 

페르시아의 사랑론은 한국문학이나 중국문학에서 보이는 사랑론(타령)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이란계 중국시인 이태백은 페르시아의 사랑노래를 중국의 사랑노래와 적절하게 혼합했다. 그는 중세 페르시아와 중국의 문학사에 가교역할을 했던 국제적인 시인이었다. 이태백과 같은 이란계 중국시인과 당시 중국에 거주했던 수많은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 페르시아 종교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담론인 사랑이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중국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흐름은 중국과 인도를 소통시켰다. 또한 페르시아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페르시아문명은 인류문명의 뿌리이자 교두보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태백과 그의 시를 재조명해 보면 좀 더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중국학계에서도 그의 시에 대한 번역작업이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이태백은 태백산으로 도사를 찾아가 비밀을 얻고자 했기에 자호를 태백이라 칭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중국의 도교와 페르시아수피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수피즘(sufism, 진리를 찾는 구도승과 탁발승의 도)을 추종하는 수피(sufi, 도인)와 도사의 의미는 동일한 개념이다.

 

이태백의 초상화

이태백이 태어나 꿈을 키운 곳, 중국 사천성 면양시 북쪽의 이백고리(李白故里)

 

이태백의 삶의 행로는 페르시아수피들의 일반적인 전형이기도 했다. 그가 말한 호인은 오랑캐와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오랑캐는 주로 흉노와 그 일파인 투르크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돌궐족이라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어의 문헌에 따르면 투르크족은 아시아 아리안인과 몽골로이드의 혼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일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몽골로이드의 얼굴 생김새에 오뚝한 코와 둥근 눈을 가지고 있어 아몬드 형의 눈을 가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아시아인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오뚝한 코를 가진 북방계 한국인은 투르크인과의 구별이 쉽지 않아 투르크인이 아니냐는 질문을 가끔 받곤 한다.

최초의 투르크계국가로 알려진 페르시아 가즈나비(962~1186)왕조는 노예출신이 왕조에 올랐던 경우로, 이 왕들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종족이 아니어서 몹시 관심이 가기도 하며 흥미롭다. 이태백 그는 744년에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노년에는 방황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762년에 눈을 감았다.

이태백의 일가는 후대에 농서(濃西)李氏로 본을 정하였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태백의 부친이 왜 굳이 李氏 성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이 당나라 황실의 성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할 뿐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태백의 부친이 자신의 성씨를 李氏로 정한 것은 李氏의 혈통이 한족이 아닌 혼혈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李氏는 安氏처럼 당시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했던 페르시아 계통의 혈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