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여행

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35)-아르헨티나의 간략한 역사

달리는 말(이재남) 2013. 12. 19. 06:15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해 건축한 5월의 광장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혁명 1주년을 기념해 광장 중앙에 세운 5월의 탑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7월9일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7월9일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꼬리엔떼스 대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의 간략한 역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건설은 원주민의 공격 때문에 라플라타지역의 식민지 중심 아순시온으로 이동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재건은 1580년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식민지시대 활동은 알토 페루의 은 광업을 위한 생산물공급을 담당하는 형태로 북서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페루에서 남하한 사람들이 투쿠만, 코르도바, 살타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라플라타지역에서도 아순시온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산타페, 코리엔테스,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을 건설하였으나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아르헨티나 인구의 대부분은 북서부에 집중해 있다.

한편 팜파스를 비롯한 정복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원주민과의 전투가 1883년까지 지속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의 중심은 18세기 전반까지 투쿠만에서 코르도바로 옮겨졌다. 그러나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라플라타 부왕령(副王領)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페루의 은 생산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등 대서양무역의 거점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정치·경제의 중심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특히 정식으로 이 항구를 통한 무역이 인정되고 나서부터 인구는 급증해 1726년에 2200명이었던 인구가 1800년에는 4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식민지 태생의 백인, 크리올료(criollo)들은 1810년에 부왕을 퇴위시키고 훈타라는 집정위원회를 설립하였고 또 1816년에는 투쿠만에 각 지방대표가 모여 「리오데라 플라타 합중국」으로 정식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산마르틴이 이끄는 군대가 칠레로 원정하여 이 나라의 독립을 도왔고, 또 페루로 북상해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지도자 S. 볼리바르와 더불어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내륙 각 지방, 중앙집권파와 연방주의파의 다툼 등 국내의 대립은 독립 후에도 계속되어왔다. 1826년 초대대통령으로 B. 리바다비아를 선출했으나, 1829년 독재자 J.M. 로사스가 등장할 때까지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한 것은 1868년 D.F. 사르미엔토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였다.

그의 통치하에서는 경제적, 문화적인 진보가 보였고, 1880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와 다른 연방주들과의 오랜 항쟁도 끝내고 유럽이민의 유입과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온대농산물 수출국으로서 급속히 발전하는 기초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도시화·공업화도 진척되어 20세기 초에는 점차 도시의 노동자, 중산층이 세력을 강화해 1916년 H. 이리고엔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급진당정권이 탄생하였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는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점철돼오면서 많은 혼란기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