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잊지 못 할 중남미 여행(20)-세계축구의 최강인 브라질의 세계최대 축구장
40분 동안 상파울루 과루료스 국제공항에 머무른 LA 750여객기는 리우에 가려는 승객을 태우고 출발을 했는데 빈자리가 많아졌다. 빈 좌석을 차지하고 리우데자네이루까지 편안하게 누워서 갔다. 2시간쯤 날았을까? 현지시간으로 오후 2시 10분에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리우공항에 아무 문제없이 착륙했으며 별 문제없이 입국심사대를 거쳐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곳 리우의 가이드 전제용씨가 우리일행을 반가이 맞는다.
리우공항을 나오면서 그는?오늘의 일정에 따르면 오후시간은 휴식을 취하기로 돼있습니다만 내일의 일정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오후 일정을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여행의 일정이 너무 타이트하게 진행되고 있어 몹시 피곤하다. 오후에는 원래의 일정대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에 반대를 하지 못하고 그가 준비해온 간단한 점심을 전용버스 안에서 먹었다.
천재 축구스타 박주영의 브라질 축구유학시절 그의 통역을 도맡아 도와주었으므로 박주영에게 자기를 물어보면 틀림없이 기억할 것이라고 자랑한다. 포르투갈 선원이 1502년 1월1일에 이 매력적인 항구도시를 발견하고 진입할 때 대서양에 접한 「과나바라 만」을 강으로 착각해 「1월의 강(Rio de Janeiro)」으로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전경이 변두리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파란색이라고도 녹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유백색을 띤 바다와 이채로움을 내뿜는 원추형의 산들을 이어주는 해변은 마치 거대한 상아를 연상시킨다. 1565년에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포르투갈사람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지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로 바뀌기 전 1763년부터 1960년까지 수도였다.
세계 3대 미항중의 하나인 리우데자네이루는 사치스런 비치리조트 그리고 삼바와 화려한 카니발의 도시로 콜로니얼 풍의 건물, 직립바위, 흰 모래밭 등이 인상적인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발전된 곳이다. 브라질의 독립과 유럽예술의 상륙, 보사노바 음악의 발상지로서 항상 역사의 국제적 무대가 되어온 곳으로 완전무결한 즐거움과 역동적인 놀이의 천재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카리카오라 한다.
카리카오의 도시로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끓어 넘치게 만든다.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에는 은행과 상점들 고층빌딩이 줄지어 있으며 과나바라 만의 경치는 그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200년 동안이나 수도였던 도시의 역사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인위적인 환경보다는 꼬르꼬바도 언덕, 코파카바나 해안, 빵 데 아수카르 같은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쇼핑객들을 위한 떠들썩한 야외 시장과 세계 최고의 보석상점들도 즐비해 있으며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쿠버, 스카이다이빙, 마운튼 트랙 등의 레포츠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세계축구의 최강인 브라질의 세계최대 마라까낭 축구장
그런데 한동안 버스차창 밖으로 우울하리만치 주황색 톤의 달동네가 연이어 펼쳐지고 있어 세계 3대 미항의 명성이 무색해진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면서 찾아간 곳은 마라까낭 축구경기장이다. 브라질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1만 3천여 명의 등록선수를 가진 700개의 프로 축구단과 응원하는 수천만의 관중들을 생각해보면 대단하다. 브라질 축구팀의 이름을 한두 개 알아두었다가 그 팀을 응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친구가 될 수 있을 정도다.
1950년 제 4회 월드컵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건설된 세게 최대의 축구장인 마라까낭은 지름이 944m, 높이 32m, 수용인원이 무려 20만 명, 최다관중 입장 기록은 22만 5000명이라니 대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축구장의 앞에는 축구황제인 펠레(Pele)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유명한 펠레는 브라질의 축구선수로 17세 때 월드컵에 출전하여 이후 월드컵 사상 최초의 3연승을 이루고 브라질 국민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 어렸을 때 헌 양말을 뭉쳐서 만든 공으로 축구놀이를 곧잘 하였는데, 그의 애칭 펠레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17세 때 월드컵에 출전, 환상적인 골인으로 2점을 올려, 브라질의 첫 우승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월드컵 사상 최초의 3연승을 이루고, 1971년 국가대표팀을 떠났다.
1974년 10월 국가대표팀에 복귀해 달라는 브라질 대통령의 간청을 뿌리치고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1975년 6월 미국의 프로팀 「코스모스」에 입단하여 활약하였다. 「축구의 신(神)」, 「인간국보」로서 브라질 국민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그는 또한 세계올림픽위원회(IOC)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Pele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는 전용버스를 타고 경기장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그 축구경기장은 보수중이라서 내부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까낭 축구경기장-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항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항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빵지 아수카르봉-